나는 왕이며 광대였지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

  • 자 :오현종
  • 출판사 :문학동네
  • 출판년 :2017-04-18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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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19년 차, 마흔다섯 살, 여성……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한 소설가 오현종의 내면 고백



스쳐가는 무수한 감정이 인생에 생채기를 내는 순간들을 세밀한 시선으로 포착한 소설가 오현종의 세번째 소설집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가 출간되었다. 그간 발표해온 작품들로 오현종은 다양한 장르를 자유자재로 변용하여 한국소설의 지평을 넓혀온 작가로 평해지곤 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의 상상력이 극한으로 뻗어나간 후에도 그 끝은 다시 일상과 맞닿아왔다는 사실이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오현종 단편 특유의 기발한 서사는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더 중요한 변화는 그녀가 드디어 소설가로서 자신의 자의식과 내면의 상처를 소설 속에 솔직히 녹여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나는 왕이며 광대였지』는 지금까지의 오현종 소설세계에 대한 작가 자신의 코멘터리와도 같으며, 근 이십 년간 이어져온 오현종 소설의 역사가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뚜렷한 전환점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그와 나의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거리,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 소설집에 등장하는 오현종의 몇몇 인물들은 꽤 유사한 특질을 공유한다. 섬세한 성정 때문에 타인이 감춘 날카로운 톱날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쓸쓸하고도 편안한 기분을 느끼고, 그러기 위해 한곳에 생활을 고정한 채 삶을 단정히 정돈하는 인물들. 게다가 이들 중 상당수는 소설을 쓴다. 단편들을 이리저리 겹쳐가며 읽다보면 어느 순간 이들은 소설가 오현종 한 사람으로 모아지기도 한다. 이 인물들, 나아가 오현종을 “혼자여도 괜찮은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혼자가 아닐 텐데”(「부산에서」)라고 외로이 중얼거리게 만든 결정적인 생의 상처들은 소설집의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소설집을 여는 단편 「부산에서」는 소설가로서 오현종의 자의식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소설가인 화자가 소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자괴감과 절망감에 서울이란 삶의 장소로부터 도피하여 부산에 머문 1년간을 그렸다. 그러나 소설가로 자신을 소개한 뒤에 맞닥뜨리는 부자연스러운 침묵, 처음 만나는 이로부터 ‘소설의 시대는 갔다’는 단호한 판정을 건네받는 순간들은 화자를 끈질기게 따라오고, 화자는 자신이 ‘소설가가 맞기는 한지’ 자조한다. 그렇지만 부산은 서울에서라면 굳이 만날 일이 없었을 인물들을 반갑게 만나게 해주는 묘한 장소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낸 삶의 틈새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화자는 내면의 상처를 되짚고 그것을 서서히 메워간다.

그녀의 예민한 기질이 세월의 흐름에 마모되기 전, 더욱 날카롭게 타인과 거리를 두었던 젊은 시절도 진솔하게 회고된다. 「K의 어머니와 면회를 갔다」는 작가가 허용한 진입 경계선을 누군가가 조심성 없이 넘어서버릴 때, 그녀가 느끼곤 했던 결벽에 가까운 반발심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995년 여름, 군에 입대한 남자친구 K를 면회하기 위해 K의 어머니와 함께 강원도 화천에 다녀오는 화자의 여정을 기록한 이 단편에는 초면인 아들의 여자친구를 안하무인격으로 하대하는 강렬한 캐릭터, K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화자의 식습관이나 젓가락 쥐는 방식을 아무렇지 않게 흉보고, 음식을 만들도록 부려먹고는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며 면박을 주는 K의 어머니는 화자가 세워둔 마음의 벽을 무참하게 깨고 들어와 화자를 상처입힌다. 여기에 K의 일방적인 결별 통고까지 더해져 화자는 한때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까지 충격을 받았지만, 이제 화자는 그때의 K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젊어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던 그들은 서로에게서 벗어남으로써 자신을 옥죄던 불안감에서 달아날 수 있으리라 믿었는지도 모른다고. 이러한 이별과 그 극복의 서정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다양하게 변주되며 오현종 소설 특유의 처연하면서도 정갈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한때는 영원하리라 기대했던 사랑에, 자신의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소설쓰기에 배반당해버린 지난한 인생. 그 앞에서 느끼는 상실감은 비단 오현종만의 것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젊었던 시절,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의 인생만큼은 뜻대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우리도 제멋대로 흘러가는 현실 앞에서 여전히 방황하고 있지 않은가. 인생이 왜 이렇게 비참해야 하는지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는 노력 끝에, 오현종은 그 모든 것이 그저 운명에 따른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표제작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는 운명이 우리의 삶을 휩쓰는 장면을 극단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소설화한 작품이다. 어느 날 잠에서 깨보니 웬 밀실에 감금되어버린 연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밀실 밖의 누군가로부터 생명을 위협당하며 점점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과정이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밀실에 갇힌 두 남녀는 한없이 무력하고 그들을 가둔 자의 의도에 대해서도 전혀 알아낼 수 없다. 그들은 점점 증폭되는 불안 속에서 갖가지 추측과 의심으로 병들어갈 뿐이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자신의 신변을 전적으로 통제당하는 이 밀실 속의 상황은 인생에 대한 비유처럼 보인다. 이 작품을 통해 오현종은 고뇌한다. 우리는 사실 운명에 의해 모든 것이 짜여진 무대 위를 움직이는 존재들이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배역은 주인공(왕)뿐만 아니라 조연 혹은 단역(광대)이 될 수도 있다고.

이 고뇌의 흐름은 「연금생활자와 그의 아들」로도 이어진다. 광대만을 연기하던 화자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재해석한 연극에서 처음으로 왕자 옷을 입지만, 새로운 연극에서 햄릿은 조연이고 광대가 주연이다. 언제고 비중 있는 역할을 연기해본 적 없는 화자는 연금을 받아 생계를 이어가는 아버지에게 의존해 살며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한다. 이러한 화자의 내적 갈등이 무대 위에서 그가 겪는 환각과 맞물리며 서스펜스를 일으키는 이 단편은 숨은 표제작으로서 소설집 전반의 주제의식을 흥미로운 서사 속에 한번 더 암시하고 있다.



과거를 지그시 응시하며, 기어코 현재를 끌어안는 소설



소설집을 닫는 마지막 작품이자 자전소설인 「호적戶籍을 읽다」에 이르면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오현종의 한층 가뿐해진 마음이 느껴진다. 호주제가 폐지되기 전, 소설가인 화자가 미국 비자를 획득하기 위해 발급받은 호적등본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설가의 눈에는 호적의 짧은 기록 속에 가족들의 곡절 많은 인생이 보인다. 화자는 소설가로서의 자질을 고스란히 발휘하여, 가부장제의 상징인 호적에서 오히려 집안 여성들의 삶을 세밀하게 복원해낸다. 화자는 할머니의 내력을 풀어내려가다 할머니에게 소녀 시절 신문사의 신춘현상문예에 산문으로 당선된 이력이 있음을 기억해낸다. 화자에게 글쓰는 자로서의 삶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운명과도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피할 수 없는, 화자 자신을 위한 배역인지도 모른다.

호적 위에서 결국 가족들의 기나긴 삶은 단 몇 줄로 남았거나 그마저도 제적되어 있다. 삶이 지금 당장은 비루하고 절망스러워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건조하고 간단한 기록으로 요약되리라는 것을 호적은 보여준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건네는 소소한 위로는 다시금 현재를 살아보기 위한 용기로 치환되기에 이른다.



문학평론가 윤경희가 발문에서 예리하게 통찰했듯이, “오현종의 소설에서 몇몇 여성들은 작가가 구축해온 이력을 되살리며 작가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생성한다”. 절망스러웠던 시간을 지난 뒤, 저자는 삶에서 한 발짝 떨어져 지난날을 소회하고 상처를 매만지며 기어코 마음을 정리해낸다.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오현종의 시선은 때로 불안하게 흔들리고 기어이 눈물방울이 고이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을 끝맺을 무렵에는 여전히 쓸쓸하지만 좀더 단단해진 눈빛만이 남는다. 그 눈으로 어떻게든 현재를 긍정해내면서, 오현종 소설의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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