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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왕자 이우

왕자 이우
  • 저자김종광
  • 출판사다산책방
  • 출판년2014-01-31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4-12-16)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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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추!>“그가 해방을 눈앞에 두고 요절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리 흘렀을 테다.” _「이우 실록」 서문에서

    최고의 이야기꾼 김종광 소설가의 첫 역사소설




    한반도는 유사 이래 왕조의 나라였다. 마지막 왕조인 조선 이왕가가 통치한 세월만 무려 519년이었다. 이씨왕조는 아이러니하게도 대한제국 13년으로 마감되는데,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 36년 이후, 해방공간에서 이왕가의 인물들이 정치권에서 철저히 배제된 것은 기이한 일이다. 세계 역사에서 이처럼 깨끗한 ‘왕조 청산’은 드물다. 우리와 비슷한 식민지 역사를 가진 여러 나라에서, 해방 이후 구왕조의 인물이 새 조국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예를 적잖이 찾을 수 있다. 구왕조의 인물이 대중의 지지를 받아 새 조국 건설기에 각계각층 세력의 조율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도 대중의 지지를 받을 만한 구왕조의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우(李?)다.

    _「이우 실록」 서문에서





    “살아야 한다. 기어코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후계자 왕자 이우를 그린 최초의 장편소설




    “나랑 결혼할 왜황녀가 내정되었다는구나. 허나 놈들이 혼담을 들고 나오기 전에 내가 먼저 약혼을 해버리겠다. 조선여자와… 온갖 방해를 하겠지. 그러나 나는 목숨을 걸고 조선여자와 결혼하고야 말겠다.”

    _본문 123쪽



    1945년 8월 6일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 그곳엔 일본 군복을 입은 한 조선인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조국의 군복을 간절히 입고 싶어했던 그의 이름은 이우. 그는 고종의 5남 의친왕 이강의 아들로 태어나,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양자로 입적되어 운형궁의 네 번째 주인이 되었다. 8월 7일 니노시마 해군병원에서 눈을 감았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3세였다.

    황적에 오른 조선 왕족 중 유일하게 조선인과 혼인한 남자, 잘생긴 외모와 다정한 성격으로 황실 핏줄들에게 ‘운현궁 오라버니’로 불렸던 남자, 술에 취하면 조선 노래를 부르고, 조선말로 화를 내기도 했던 남자, 이우. 그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로맨티스트였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꿈꾸었던 혁명가였다. 그의 장례는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일왕이 항복 선언을 한 이후로 미뤄 치러졌다.



    『왕자 이우』는 능청스런 입담과 해학으로 이문구, 성석제의 뒤를 잇는 이야기꾼으로 주목받아온 김종광 소설가가 김종광만의 문체로 쓴 첫 역사소설이다. 작가는 이우의 삶을 “일제강점기 조선어 신문에 ‘이우공’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기사”를 바탕으로 능청스럽게 사실이 기록된 ‘실록’처럼 되살려 냈다. 작가가 참고한 기사는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중앙일보」 「중외일보」의 224건으로 “대부분의 기사는 단신으로 이우의 행적을 보도한 것이다. 장문의 기사는 몇 건 되지 않는다.” _‘작가의 말’에서

    “이씨왕조의 마지막 인물로 널리 알려진 영친왕 이은은 대중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생애를 살았다. 반면에 (이은의 조카인) 이우는 대중의 지지를 받을 만한 여러 조건을 갖추었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자존심’이란 평가를 받을 만한 족적을 남겼다. 그가 해방을 눈앞에 두고 요절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리 흘렀을 테다.” _「이우 실록」 서문에서



    아사카 타카하고(이우의 육사 동급생): “이우군은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습니다. 글자쓰기도 능숙하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 노래도 했고 조선 노래도 불렀습니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저는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_<조선황족 이우, 그는 왜 야스쿠니에 있는가?>(KBS, 2007년 8월 14일 방영)





    “히로시마에서 죽은 나는 조선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운현궁의 어린이 되는 리우공자는 매우 영리하고 활발하여 유희이든지 창가이든지 큰 아해보다 조금도 못지 아니할뿐 아니라 (…) 천생 효심이 있는 듯하야 비탄 중에 계신 리준공비의 위로도 매우 적지 아니하시겠더라. _「매일신보」, 1918년 3월 29일자



    소설은 「이우 실록」과 「이우 외전」으로 나뉜다. 「이우 실록」은 “일제강점기 신문과 각종 문헌에 기록된 단편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이우의 생애를 복원한 팩션”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사료로는 이우의 사상과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 거의 확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소설 형식을 빌려, 이우를 광무제와 융희제(순종)의 유지를 받는 왕조의 후계자로, 고뇌하는 청년으로, 대중을 사랑했던 지식인으로,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유일한 인물”로 그려냈다. 작가는 “이우의 진짜 생애가 팩션의 생애와 최대한 가까웠기를 바라며”(「이우 실록」 서문에서) 소설의 1부 격인 「이우 실록」을 썼다.

    “이우는 원자폭탄에 당하여 비명횡사했지만, 대중은 그의 죽음을 쉬이 믿지 못했다.” 「이우 외전」은 「이우 실록」에서의 이야기가 연결된다. “이우가 일본에서 죽지 않고 조선으로 살아 돌아와서 대한대중공화국 정부를 구성하고 자주독립전쟁을 일으킨다는 거대한 이야기는, 일종의 구전설화다. 소문들이 떠돌다가 큰 소문으로 뭉쳤고, 소문은 이야기의 뼈대를 갖추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이에 살이 붙었다. 떠도는 이우 설화를 집약하여 하나의 소설로 엮은 것이, 「이우 외전」이다.”



    “며칠 전 이우는 히로무에게 긴밀히 부탁했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을지도 모른다.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면 나는 돌연 사라질 것이다. 나는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다. 히로시마에서 죽은 나는 조선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히로무, 나의 부활을 도와줘야 한다.”_본문 272쪽





    망각된 역사를 새로운 입담으로 되살린 역사소설 『왕자 이우』

    패망한 나라의 황족, 세기의 로맨티스트

    그리고 새 시대를 꿈꾼 몽상가…




    “내가 기다린 것은 조선 해방이 아니라 자주독립이다.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이 아니라, 우리 대중이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독립!”_본문 362쪽



    『왕자 이우』에서 작가는 자주독립이 아닌, 외세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왕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은 조선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알아들었다 해도 천황이 떠들어댄 소리가 ‘해방’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다수 조선 사람은 뜨거운 정오에, 어리둥절하게, 해방을 맞이했다.”(본문 363쪽) 작가는 또한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분열, 신흥세력인 자본가들의 등장 등 해방 전의 조선 사회를 각 정파와 세력을 ‘어중이떠중이’를 모아 통합하려는 ‘이우’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기득권층과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가진 이들에게 몰락한 왕조의 후계자 이우는 몽상가이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현재 인터넷에 떠도는 이우 관련 그들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다. ‘조선여자와 결혼하기 위한 저항과 투쟁’ ‘독립운동 이야기’.” 그러나 “이우가 독립운동을 했었으면 하는 바람은 간절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자료는 전무”하다. 김종광 소설가는 과감하게 “이우가 자주독립전쟁을 일으켜 대통합 자유 평등 국가를 건설한다는 황망한 이야기”(「이우 외전」 서문)를 해방 전 대혼란의 시기 속에 작가 특유의 입담으로 능숙하게 되살려냈다. “실제의 비극의 역사를 잠깐이라도 망각”하기 위한 이야기가 담긴 소설 『왕자 이우』는 아쉬움으로 점철된 우리의 역사를 위트 있게 봉합하고 있다.



    “이우는 1945년 8월 15일,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의 운현궁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흥연군에 추봉되었다. 이 소설이 역사 속에 망각된 이우 왕자의 생애가 발굴되고 조명되는 데에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랍니다. 삼가, 이우 왕자의 명복을 빕니다.” _‘작가의 말’에서





    이우



    이우(李?)는 경술국치 2년 후인 1912년 광무제(고종)의 5남인 의친왕의 차자로 태어났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장손 이준용이 사망하자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새 주인이 되었다. 10살이 되던 해, 일제에 볼모로 잡혀 학습원을 거쳐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를 졸업했으나 조선말로 화를 내고 조선노래를 부르는 등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일본인과의 결혼을 강요받았지만, 그는 끝까지 저항하여 대한제국의 황족 중 유일하게 조선인(박영효 손녀 박찬주)과 결혼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던 1945년 8월 6일에 피폭되어 8월 7일 사망하였고 장례식은 일제가 항복 선언을 하던 1945년 8월 15일에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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