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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그 섬에 내가 있었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 저자김영갑
  • 출판사휴먼앤북스
  • 출판년2013-09-04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9-10-22)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 듣기기능 TTS 지원(PC는 추후 지원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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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어도를 훔쳐본’ 사진가 김영갑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나이 47세. 이름 김영갑. 충남 부여가 고향. 지금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에 살고 있습니다. 보통 그 나이의 대한민국 남자라면, 아이들 교육 문제로 골머리를 앓거나 직장에서의 명예퇴직을 걱정하고 있을 것입니다만, 이 남자는 전혀 그런 걱정이 없습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지금은 이 남자를 부양할 가족이 없다는 것이 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남자는 제주도를 오가는 바람을 만지며, 떠오르는 해와 지새는 달을 보며, 억새처럼 휘청거리며 그저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 남자는 사진작가입니다. 아니 이제 사진 작가였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카메라 셔터를 누를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사진 작업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남자는 20여 년 전에 카메라 하나를 달랑 메고 제주도에 왔습니다. 그리고는 제주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주도의 사람과 자연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달도 찍고 별도 찍고 바다도 찍고 산도 찍었습니다. 그가 찍지 않은 것은 제주도에 없는 것입니다.

    필름이 떨어지면 막노동을 해서 필름을 샀습니다. 배고픔은 참을 수 있어도 필름이 떨어지면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해안 마을에서도 중산간 마을에서도 마라도에서도 몇 년간 살았습니다.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제주도의 빛과 바람을 그는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훌쩍 흘렀습니다.

    이 남자는 이제 밥도 먹지 못합니다. 죽과 같은 유동식으로 천천히 식사를 해야만 합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합니다. 말도 힘들여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라고도 하는 루게릭 병 때문입니다. 이 병은 정확한 발병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는 불치의 병입니다. 확증이 되면 대개 5년을 넘기기 힘들다지요. 한때 75kg이던 그의 건장한 육체는 이제 43kg으로 볼품없이 줄어들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이제 그의 사진을 아끼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련한 사진 갤러리가 있고, 그가 몸으로 마음으로 찍은 20여만 장의 필름이 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그뿐입니다. 그의 사진 갤러리는 폐교된 삼달초등학교를 5년간 임대하여 그가 구상해서 꾸민 공간으로, 2002년 7월 1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한라산의 옛 이름에서 따와 ‘두모악’이라 하지요. 최근에는 관광객이나 입소문으로 전해들은 사진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제주도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몸은 병들었지만 이 남자는 오히려 평화를 찾았습니다. 미친 듯한 열정으로 찍어대던 사진도 더 이상 찍지 못하고, 중산간을 오르내리던 튼튼한 다리도 말을 듣지 않지만, 그래서 돌볼 말 한 마리 없는 제주도의 마지막 테우리(목동) 같은 신세가 되었지만, 이 남자의 가슴에는 회한과 미련보다는, 슬픔과 애착보다는, 마음속의 화해와 고즈넉한 일몰의 평화가 있습니다. 그는 생명이 역동하는 대자연 속에서 20여 년에 이르는 사진 작업을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시기하고 다툴 뿐이지, 세상은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라고 그는 우리의 바쁜 걸음을 멈춰 세웁니다.





    섬을 사랑한 남자, 그 남자를 기른 섬



    제주도 중산간 마을에 자신의 전 생애를 사진과 맞바꾼 한 사내가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전해진 느낌은 감동이었다.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으련만 세상의 편안함과 타협하지 않고 20여 년을 한결같이 사진에만 매달려 살아온 고집이라니….

    게다가 그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제주라는 섬은 또 어떤 곳인가. 이국적 정취를 물씬 자아내는 국내 제일의 휴양지. 대다수 사람들이 기억하는 제주도는 그런 곳이다. 하지만 제주라는 섬을, 그 섬이 품고 있는 뭇 생명들을 단순히 그 말로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허전한 구석이 있다. 사진가 김영갑은 관광지로서의 제주만을 추억하는 ‘눈 뜬 장님들’에게 섬의 내밀한 속살을 보여주려 한다.

    김영갑은 섬에 첫발을 디딘 이십대 시절 이후 지금까지, 제주의 자연과 토박이들을 만나며 누구보다도 제주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고 느낀 사람이다. 바다와 오름과 들판… 그 안에서 터 잡고 살아온 토박이들의 눈물겨운 삶을 그만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심지어 제주 토박이들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섬의 내밀한 속살을 그는 무심히 스쳐 가지 않는다. 조금 모자라게, 부족하게 살았어도, 그런 삶을 선택한 대가로 그는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많은 것들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그가 섬에서 울고 웃으며 온몸으로 헤쳐 온 지난 20여 년간의 이야기를 한데 묶은 것이다. 1부에서는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무엇에 홀린 듯 섬에 스며들어 뿌리내리기까지의 과정과 그의 온 생애를 지배하는 사진, 그리고 그를 사로잡아버린 섬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겨 있다. 10여 년 전 그가 틈틈이 써둔 글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제주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들어보기 힘든 제주 방언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 글맛을 더한다. 2부에서는 예고 없이 찾아온 병마와 힘겹게 싸우며 절망의 끝에서 내면의 평화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사진가가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된 절망적인 상황을 넘어 사진 갤러리를 구상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준다. 삶의 진정성이 배어 있는 글이 읽는 이의 가슴을 따뜻하게, 또 눈물겹게 적시며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진가 김영갑의 삶에서 사진을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듯, 이 책에서도 사진은 텍스트 못지않게 많은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풍경과 대화하게 만들고, 오름이 말을 걸고 들판의 나무들이 대답하는 사진이다. 20여 년에 걸쳐 찍어놓은 필름들을 모두 이어놓으면 한라산을 몇 번이나 왕복할 수 있는 길이가 된다. 이 중에서 그의 사진 주제인 ‘외로움과 평화’가 가장 잘 표현된 6×17의 파노라마 사진 70여 컷을 가려 책에 수록했다.

    그는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을 20여 년에 걸쳐 비로소 완성했다. 똑같은 구도로 잡힌 오름 사진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시선에 잡힌 ‘은은한 황홀’이, 그가 셔터를 누르던 바로 그 순간에 느꼈을 감동만큼의 생생함으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루게릭 병으로 투병생활을 한 지 어느덧 5년째, 그는 이제 사진을 찍기는커녕 한 손으론 휴지 한 장 들 수 없을 만큼 기력을 소진한 상태다. 그럼에도 병마가 그에게서 앗아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사진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과 대자연의 품에서 찾은 마음의 평화가 그것이다. 김영갑의 사진과 글은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들, 그리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독자들은 책을 통해 한 영혼이 이루어낸 고귀한 신화에 감동하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한 권의 책이 건조한 생활의 틀에 갇혀 사는 사람들을 생명이 역동하는 대자연의 넉넉한 품으로 안내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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