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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공부하는 삶

공부하는 삶
  • 저자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 출판사유유
  • 출판년2013-05-03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3-08-16)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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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

    “배우고 때로 읽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씀이다. 공자의 말씀이 아니라도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학습을 하지 않으면 온전한 삶을 살기 어렵다는 사실은 모두 익히 안다. 서양에 이런 공자의 말씀을 따라 한평생을 공부하는 즐거움으로 산 사람이 있다. 한국 독자에게는 낯설 이름일 프랑스의 수도사 세르티양주는 『신학대전』으로 가톨릭 신앙을 집대성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한 권위자이다. 『공부하는 삶』은 그가 쓴 책 가운데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고 가장 유명한 책이다. 1920년에 초판이 발간된 이 책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미권에서도 지금까지 읽힌다. 지금까지도 이 책을 공부의 길잡이로 삼아 귀중한 영감과 통찰력, 용기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독자가 적지 않다.

    세르티양주는 지성인을 ‘지적인 일’이라는 소명에 따라 ‘성별’(聖別)된 존재, 신성한 일에 쓰이도록 선택받은 존재라고 본다. 세르티양주는 “지적 소명은 다른 모든 소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능과 능력에, 이성으로 판단해야 하는 일종의 내적 충동에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지성인에게 공부는 삶의 중심이라는 말이다. 운동선수가 운동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농민이 농사일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조율하듯이 지성인은 공부를 위해 삶 자체를 규율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하여 그가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먹고사는 일을 도외시하고 공부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루에 두 시간을 공부에 할애할 수 있는가? 그 두 시간을 온전히 열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자신감을 가져라. 아니, 고요한 확실성 안에서 편히 쉬어라.”

    그러나 저자가 “공부하는 사람들은 궁핍과 오랜 훈련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더러는 인간을 넘어서는 끈기를 보여야 한다”라고 말하듯 공부하는 삶은 무척이나 고된 삶이기도 할 것이다. 역자가 정리한 것처럼 소명을 따르는 공부는 명성이나 이익을 얻으려 하거나 외적 성공을 추구하는 공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는 무관한 절대적 척도에 따라 자신의 완성을 추구하는 공부다.

    이렇듯 공부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맛보고자 하는 예비 지성인에게 이 책은 곁에 가까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읽으며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북돋아주는 잠언서이다. 이 책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실제로 자신의 삶에 적용한 한 지성인의 글을 아래 전재한다. 『공부하는 삶』의 영문판 앞에 실린 조지타운대학교 정치철학 담당 교수 제임스 샬의 글이다.





    사유의 기쁨과 고통에 관하여



    우리 대다수는 나이가 들어서 누군가 우리가 젊었을 때 어떤 것에 관해, 대개는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 우리의 삶이라는 기획에서 크나큰 도움이 되었을 만한 어떤 책들에 관해, 특히 우리가 사태의 진실을 알 수 있도록 도왔을 만한 책들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런 책들 가운데 일부는 진실, 현실, 이치에 대한 책이지만, 상당수는 오히려 ‘나는 어떻게 알기 위해 애쓰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책이다. 사실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다른 종류의 배움』(Another Sort of Learning)이라는 책을 직접 썼다. 그 책에서 나는 진지하게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출발점이 될 만한 책들 가운데 하나로 ‘지적인 삶’에 관한 세르티양주의 책을 언급했다.

    그러나 세르티양주의 책은 좋은 출발점 그 이상을 제시한다. 그는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어떻게 읽고 쓸 것인지, 어떻게 시간을 규율할 것인지, 더 나아가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규율할 것인지에 관해 분명하게 말한다. 또한 그는 진정으로 지적인 삶이라면 반드시 따르기 마련인 정신의 삶에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며 관조적 삶은 인간이 열망해야 하는 무언가라고 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도 우리에게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것이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 것은 아닌지에 관해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지적인 삶이 고귀한 것임을 모호하게나마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삶을 달성하면 어떤 결과가 생길 것인지에 관해서는 별로 들은 바가 없다. 아무도 그러한 조건에 관해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어렸을 적에 짐작했던 것보다 더 나이가 들어서야 지혜가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알기만 했던 것들을 달성하도록 도왔을 방법들이 과연 있었을까 하고 의심한다.

    위대한 프랑스 도미니크회 수도사 세르티양주(1863~1948)는 1920년에 『공부하는 삶』(La Vie Intellectuelle)이라 이름 붙인 책을 썼다. 이 책은 즉시 성공을 거두어 판을 거듭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최근에 나는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 다니는 젊은 장교에게 이 책을 추천했는데, 그는 앞으로 육군사관학교에서 가르칠 예정이었다. 그는 미국가톨릭대학교 출판부에 이 책을 주문했지만 당시 절판된 상태였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마침 이 출판부 마케팅 책임자에게 편지 쓸 일이 있었던 나는 이 책이 절판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고맙게도 그는 출판부에서 개정판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서 나는 이 책에는 새로운 서문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거의 모든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컴퓨터 사용자들이 파일 카드에 메모를 적어두라는 세르티양주의 조언을 읽고 이 책을 덮어버리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나는 어떤 컴퓨터 사용자는 나의 도움 없이도 세르티양주의 조언을 컴퓨터에 맞추어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컴퓨터가 표준적 도구가 되기 전에 쓰였다는 이유로 이 영원한 책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기지는 않을지 우려되었다. 아무튼 다행히 그 훌륭한 출판부 책임자는 나에게 새로운 서문을 써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기꺼이 쓰고말고! 어떤 의미에서 이 간략한 서문은 이 탁월하고 쓸모 있는 책이 계속 출간되어야 하는 이유와 대학교와 대학원의 젊은 학생, 노인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이 계속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나의 의견이다. 나는 대개 성 토마스에 관한 수업에서 이 책을 사용했는데, 그 밖에도 내가 이 책을 수업에서 사용할 때마다 대학교 학생들은 나중에 이 책이 기억에 남았다고 말하곤 했다. 이 책이 그들에게 대학에서뿐 아니라 삶 전체에 걸쳐서 실천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지적 호기심을 지속하는 방법에 관해 아주 많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넌지시 말했듯이, 이 책의 첫인상은 예스럽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인상은 독자에게 아주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세르티양주는 어떻게 메모를 하는지,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하고 어떻게 출간하는지, 어떻게 메모를 정리하는지, 나아가 어떻게 사유를 조직하는지에 관해 부지런히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세르티양주가 사용했던 펜과 초기 타자기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 그가 보았다면 눈이 휘둥그레졌을 정교한 컴퓨터와 출력장치를 사용한다는 이유 때문에 예스럽다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세르티양주가 탁월하게 쓴 바 있고, 이 책을 쓰도록 영감을 준 토마스 아퀴나스가 13세기에 단 25년 동안만 생산적으로 활동했음을 명심해야 한다. 아퀴나스는 1920년대의 세르티양주조차 가지고 있던 장치들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퀴나스는 놀랄 만큼 많은 양의 찬란하고 심오한 작품들을 남겼다.

    아퀴나스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최신 컴퓨터가 있었다면 과연 아퀴나스는 더 많이 혹은 더 잘 쓸 수 있었을까? 그랬을 가능성은 아주 적어 보인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컴퓨터는 아퀴나스에게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성 토마스는 성서를 포함하여 그 이전의 위대한 저자들의 모든 지식에 정통하기 위해 엄청난 기억력과 신비로운 역량을 계발했기 때문이다. 물론 성 토마스도 이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여러 책을 읽어야 했지만, 이를 통해 그는 어떻게 기억력과 역량을 계발하는지를 배웠다. 세르티양주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정직함과 기도, 근면한 노동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는 기쁨으로 충만한 진정으로 지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해 중세 도미니크회의 위대한 수도사에게서 찾을 수 있는 교훈들을 어떻게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본받을 것인가이다.

    세르티양주의 책을 읽으면, 그가 우리에게 아퀴나스의 막대한 생산성과 통찰력의 비밀 일부를 누설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하루, 한 주, 한 달은 아주 긴 시간이다. 세르티양주는 우리 모두가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성 토마스가 했던 것처럼 모든 시간을 지적인 삶에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르티양주는 가능하다면 우리가 젊을 때 삶을 조직함으로써 단단한 토대를 다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남은 인생을 이 단단한 토대 위에 무언가를 쌓아나가는 데 쓰라고 가르친다. 요컨대 세르티양주는 습관, 규율, 생산성과 진리에 관해 가르쳐준다. 그는 만일 우리가 꾸준히 하루에 한두 시간 동안 더 높은 것들을 진지하게 추구한다면 진정으로 지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그는 완고하거나 비현실적이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을 따지면서 세르티양주가 의도한 바를 놓치곤 한다.

    어떤 종류의 배움이든 처음에는 고역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노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우리는 배움에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하는 지점, 어떤 주제에 관해 다시 고찰하거나 쓰거나 사유하고 싶어 못 견디는 지점까지 도달해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주제는 매혹적이다. 우리 시대의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활발한 지적인 삶을 살았던 체스터턴(Chesterton)은 언젠가 흥미롭지 않은 사람들만 있을 뿐 흥미롭지 않은 주제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이 ‘흥미롭지 않음’의 상당 부분은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주제를 어떻게 혹은 왜 살펴보아야 하는지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르티양주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라고 가르친다. 그는 심각한 것이건 사소한 것이건 간에 도덕적 결함들이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을 보는 자유, 있는 그대로를 보는 자유를 방해할 수 있다고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지적인 삶을 원하는가?” 세르티양주는 저자 후기에서 이렇게 묻는다. “당신 안에 고요의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하라.” 우리는 낮이나 밤이나 소음과 일종의 불안에 둘러싸인 채 살아간다. 때로는 배울 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세르티양주는 우리에게 그럴 시간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삶이 바쁘고 꽉 찬 듯이 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시간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앎을 열망함으로써가 아니라 관심을 가짐으로써 처음으로 그 시간을 발견한다. 세르티양주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시간 사용 둘 다에 관해 양심을 되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지적인 삶, 관조하는 삶은 그 자체가 활동으로 채워져 있는데, 그 활동이란 알고자 하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활동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성인’은 세르티양주가 ‘지적인 삶’에 관해 말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과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폴 존슨(Paul Johnson)이 『지식인』(The Intellectuals)에서 말했듯이, 계급으로서의 지식인은 그들 자신의 내적인 도덕적 혼란의 산물로서 이론과 설명을 발전시킬 것이다. 우리는 지적인 삶이란 위험한 삶일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가장 나쁜 악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서 생겨난다. 천사 중 가장 빛나는 천사는 타락한 천사였다. 이 냉정한 고찰은 내가 세르티양주의 이 얇은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밝혀준다. 그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과 우리의 영혼을 선(善)으로 이끌지 않는 것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적인 삶은 위험천만한 삶이 될 수 있으며, 흔히 그렇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지적인 삶의 영광을 거부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세르티양주는 우리가 추구하는 이러한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줄 때 매우 조심스러워하는데, 그것들이 우리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우리에게 세상과 신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은 틀림없이 그 실용성에 놀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처음에는 무엇을 하고 그다음에는 무엇을 할지를 차례로 알려주는 안내서이다. 지적인 삶이란 면도를 하거나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어느 날 아침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막대한 통찰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세르티양주는 어떤 통찰력은 그런 방식으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통의 과정은 진리를 추구하고, 알고자 하고, 실체를 궁금해하는 습관적인 관심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이 책은 학구적 교수들(그들이 이 책을 읽는다 해도 조금도 해를 입지는 않겠지만)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이 모두―정육점 주인, 은행가, 촛대 제작자―를 위해 쓰였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책은 아주 많은 사람을 위한 책이며, 물리학이나 형이상학에 대한 고등 학위를 가진 사람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알 수 있으며, 우리의 시야를 지배하곤 하는 미디어나 이데올로기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정확하게 무엇을 알라고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어떻게 알려고 애쓰고 어떻게 앎을 계속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책이다. 이 책은 어떻게 꾸준히, 끈기 있게 그리고 비판적으로 알 수 있고, 그렇게 알아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를 가르침으로써 내적으로 생동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쓰였다.

    나는 『공부하는 삶』을 모든 진지한 학생들의 책상뿐 아니라 대부분의 진지하지 않은 학생들의 책상에도 올려놓을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 인간의 삶은 신의 삶에 비하면 “진지하지 않다”고 말했다. 앎으로부터, 알고자 함으로부터 비롯되는 느긋한 한가로움, 자유롭다는 감각 같은 것이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영혼으로 흘러들어온다. 이 책을 책상이나 선반에 놓아두면 끊임없는 자극을 받을 수 있으며, 지적인 삶이 어떤 낯선 것, 우리가 배워가는 과정에서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님을 상기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독해야 하고, 이 책의 가르침을 우리 자신의 방식에 따라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세르티양주가 제안하는 것을 우리의 컴퓨터에, 우리의 책에, 우리의 시간에 적합하도록 바꾸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책은 우리의 삶에 계속해서 실제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가 이 책의 지침을 따른다면, 이 책의 격조 높은 제목 ‘공부하는 삶’이 암시하듯이 내적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즐거운 방식으로 생동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마지못해 받아들여야 하는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위대한 프랑스 수도사는 여전히 우리에게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그가 우리를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자유롭기만 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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